중증 치매 노인의 손을 꼭 잡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종교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그 모습에서 신앙의 숭고함을 발견할 것이고, 누군가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간절함을 볼 것이다.
그런데 현직 요양보호사라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기도도 좋지만, 기도하는 시간에 기저귀라도 한 번 갈아주면 어떨까?'
물론 기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도하는 마음도 귀하고, 종교적 위로도 필요하다. 다만 중증 치매 노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노인의 손을 잡고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 손이 대변으로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주는 데 쓰인다면 그것 역시 매우 훌륭한 신앙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풍경이 떠올랐다. 바로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이다.
기도만 하는 종교인과 말로만 약자를 위한다는 진보주의자. 과연 무엇이 다를까?
물론 모든 종교인이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계에는 오랫동안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노숙인을 돌보고, 장애인과 노인을 위해 헌신해 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회복지 현장을 들여다보면 종교계가 남긴 시설 운영과 봉사활동의 기록은 상당히 풍부하다.
그렇다면 소위 운동권 출신이나 진보를 자처하는 단체들은 어떨까?
그들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중증 치매 노인과 장애인,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어떤 시설을 운영하고 어떤 휴먼서비스를 제공했는지 기록을 찾아보면 의외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내가 모든 운동권 단체의 활동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헌신하는 단체와 활동가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외치는 목소리의 크기와 직접적인 돌봄 실천의 규모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어 보인다.
이쯤 되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운다는 사람들 가운데 직접 중증 치매 노인의 기저귀를 갈아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장애인의 식사를 직접 떠먹여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노인의 몸을 씻기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치매 노인의 곁을 지켜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유튜브 방송에 나와 사회적 약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이크 하나만 있으면 된다. 노동자와 자본의 모순을 설명하고, 불평등을 비판하고, 복지국가를 외치는 데 특별한 장비도 필요하지 않다. 구독자만 늘어나면 후원도 들어오고, 방송의 영향력도 커진다.
그러나 요양원에 가보라. 중증 치매 노인의 기저귀를 갈아보라. 식사 시간에 한 숟가락씩 밥을 떠먹여 보라. 치매 노인이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해도 짜증 내지 않고 대답해 보라.
거기에는 유튜브 조회 수도 없고, 박수도 없고, 정치적 명예도 없다. 오히려 냄새와 오물, 허리 통증과 감정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그 일을 하루 종일 해도 사회적 명예는커녕 최저임금 수준의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기묘한 풍경이다.
말로 약자를 위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명성을 얻고, 실제로 약자의 몸을 씻기고 먹여주는 사람은 가난을 걱정한다.
말로 노동의 가치를 설명하는 사람은 강연료와 후원금을 얻고, 노동 현장에서 직접 노동하는 사람은 시간당 임금에 자신의 생계를 맡긴다.
말로 복지국가를 설계하는 사람은 전문가 대접을 받지만, 그 복지국가가 실제로 작동하도록 노인의 대변을 치우고 식사를 돕는 사람은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도대체 누가 더 사회적 약자와 가까이 있는가?
나는 여기서 진보라는 말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보를 자처한다면 그 이념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디에서 완성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는 중요하다. 제도 개선도 중요하고, 복지예산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정책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사람의 생활이다.
중증 치매 노인이 오늘 밥을 제대로 먹었는가. 욕창이 생기지는 않았는가. 기저귀는 제때 갈았는가. 혼자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지는 않았는가.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데 복지국가를 외친들 무슨 소용인가?
복지는 구호가 아니라 서비스다. 인간의 존엄성은 선언문에 적혀 있는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매일 확인되는 생활의 조건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이념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높은 지위를 부여하면서, 그 이념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낮은 임금을 지급한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임금 격차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뜻이다.
가령 어떤 정치인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발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자. 언론은 그 장면을 보도하고, 유튜브는 조회 수를 올릴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정책을 현장에서 실현하는 요양보호사가 허리를 다치고,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최저임금 수준의 보수를 받는 현실에는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그 정치인은 약자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는 평가를 받을지 모르지만, 요양보호사는 약자의 몸을 씻기다가 자신의 몸이 아파도 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진보란 무엇인가?
혹시 진보라는 것이 약자를 직접 돕는 일보다 약자를 위해 말하는 능력을 인정받는 직업으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 약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보다 약자의 고통을 설명하는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진보라기보다 약자의 고통을 이용한 일종의 지식산업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말로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얻는 부와 명예에는 상당히 관대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남의 돈을 벌 때만 문제가 되고, 자신의 명예와 수입을 늘리는 데는 별다른 모순이 없는 모양이다.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노동자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불평등을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면, 그것을 무슨 이념이라고 불러야 할까?
물론 유튜브 방송을 하고 강연을 하며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말과 실천 사이의 거리다. 남에게는 헌신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그 헌신의 현장과 거리를 두고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진보성을 자랑하기 전에 한 번쯤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치적 구호를 하나 더 만들라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라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면 그 약자가 실제로 생활하는 곳에 가보라는 것이다.
요양원에 가서 하루라도 봉사해 보라. 중증 치매 노인의 식사를 도와보라. 기저귀를 갈아보고, 몸을 씻겨보고, 밤새 잠들지 못하는 노인의 곁을 지켜보라.
그런 다음에도 사회적 약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한다면 그 말에는 훨씬 더 큰 무게가 실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종교인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도는 기도대로 하되, 가능하다면 그 손으로 기저귀도 갈아주면 좋겠다. 신앙이 사랑을 말한다면 그 사랑이 손끝에서도 확인되면 좋겠다.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그 손으로 밥을 떠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도 사랑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는 약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약자를 위해 연설하는 사람도 이미 충분히 많을지 모른다. 지금 더 필요한 사람은 말없이 약자의 몸을 씻기고, 밥을 먹이고, 하루를 버틸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여다봐야 할 모순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당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무엇을 외쳤는가? 그리고 그 약자를 위해 당신의 손으로 무엇을 해보았는가?
유튜브에서 약자를 위해 한 시간 연설하는 것보다, 요양원에서 중증 치매 노인의 기저귀를 한 번 갈아주는 일이 더 가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기저귀를 갈아본 사람은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존엄한 노동인지 안다.
그러니 진보를 외치는 분들에게 작은 제안을 하나 하겠다.
다음 유튜브 방송의 주제를 바꿔보면 어떨까?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적 약자의 권리' 대신에 '중증 치매 노인의 기저귀 갈기 체험기'로 말이다.
조회 수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만큼은 진보라는 말을 조금 덜 부끄럽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진보는 마이크를 잡는 손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기저귀를 갈아주는 손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