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의 운도 여기까지인가. 내가 죽어서 가족들을 살리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친지가 조언한다. 아 미칠 일이다. 미칠 듯이 달려온 나날들이 물거품같이 모두 사라지게 생겼으니. 그래도 써보련다.
교과서에서 배운 **심훈의 《상록수》**는 비련의 사랑 이야기다.
농촌을 계몵하겠다는 같은 꿈을 품은 채영신과 박동혁.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사랑보다 시대를 먼저 선택했다. 결국 채영신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박동혁은 평생 그녀의 뜻을 이어간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야기가 끝난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상록수》의 마지막 장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소설 속 박동혁의 실제 모델이 된 고 김학준 선생의 조카였다.
김학준 선생은 훗날 조선대학교 교학국장(현재의 부총장에 해당하는 직책)을 지냈으며, 심훈은 그의 실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상록수》를 소설로 재구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소설에는 실리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었다.
채영신 여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김학준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다. 급히 귀국했지만 이미 장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관을 장지로 옮기려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몇 사람이 달라붙어도 관이 꿈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김학준 선생은 말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관 위에 덮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관이 움직였고, 무사히 장지까지 모실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집안에 전해 내려왔다.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세월은 흘러 1975년.
김학준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평생 그의 곁을 지켜준 부인 길 여사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면, 하늘에서라도 함께하게 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채영신 여사와 합장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채영신 여사의 묘를 이장하는 날.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관 속에서 오래전 김학준 선생이 덮어주었다는 외투가 실제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조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예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관이 움직이지 않아 외투를 덮어주었다는 전설이 정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모두 검증된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사실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성경의 기적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현실이 팍팍할수록 사람은 기적을 갈망하고, 죽음조차 끊어낼 수 없는 사랑을 꿈꾼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오래도록 전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끝내 놓아주지 못하는 존재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못다 한 사랑이 죽음 이후에는 이어졌기를 바란다.
사실인지 전설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록수》는 소설 속에서 끝났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사랑 이야기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