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회는 성급한 비대면 진료 법제화 논의를 즉각 중단하고, 시범사업에 대한 면밀한 평가를 기반으로 비대면 진료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에 착수하라.
이재명 정부는 지난 9월 123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이 중 85번 과제 ‘일차의료 기반의 건강·돌봄으로 국민건강증진’ 속에 ‘비대면 진료 확대’를 포함시켰다. 비대면 진료는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 한시적 시범사업으로 허용된 과제였으나, 이제 정부가 반드시 추진해야 하는 국가 차원의 과제가 된 것이다.
정부는 85번 과제의 목표로 ‘만성질환 관리율 향상을 통한 국민의 건강수명 연장’을 내세웠다. 즉, ‘비대면진료’는 ‘사는 곳 중심의 일차의료체계 구축’, ‘지역기반 건강증진 강화’, ‘지역사회 정신건강 관리체계 확립’이라는 주요 정책과 함께 ‘만성질환 관리율’ 향상을 위한 중요한 정책수단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비대면진료는 안전성과 효과성을 충분히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건강권 보장을 위한 정부의 정책수단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의 영리화와 상업화를 추동함으로써 의료의 공공성을 약화시킨다는 주장과 근거들이 차고 넘친다. 또한 비대면진료의 가장 큰 수혜집단으로 거론되는 노인, 장애인, 도서지역을 비롯한 의료취약지역 주민들은 실제로는 비대면진료 접근성이 가장 떨어지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은 의료법 개정을 통하여 기어이 비대면진료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가 그토록 만성질환 관리율을 향상시키고 사회구성원들의 건강수명을 연장하고자 한다면 안전성과 효과성이 의심되고 의료의 상업화를 심화하는 ‘비대면진료’를 제도화하는데 힘을 쏟을 일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 가까이에서 건강을 보살피고 만성질환도 관리하는 일차의료체계, 공공부문의 건강관리 체계를 탄탄하고 촘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비대면진료를 제도화하겠다면 지금까지 진행된 비대면진료 시범사업이 사회구성원들의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만성질환 관리에 기여했다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비대면진료의 수혜자라고 정부가 강변했던 노인, 장애인, 의료취약지역 주민들의 만성질환 관리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 4일 ‘영리 플랫폼 중심 원격의료 법제화 이대로 괜찮은가?’를 주제로 한 국회토론회에서는 그동안 진행되었던 시범사업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자료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부의 시범사업이 공식적인 사업이 되기 위해서는 시범사업에 대한 체계적인 모니터링과 평가를 통해 정책을 지속적으로 다듬고, 개선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과정도 거치지 않은 시범사업이 어떻게 국정과제가 되고 법률에 근거한 공식적인 사업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시범사업 기간 비대면 영리 진료 중개 플랫폼 기업은 급격히 증가했으며, 정부의 정책이 이들의 이익을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지 의구심을 가지는 이유다. 또한 이를 통하여 경제권력의 보건의료부문 내에서의 이윤 축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지 묻는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8월 발표한 ‘새정부 경제성장전략’에서 AI 대전환을 통한 신산업 성장을 위하여 규제를 개선하겠다고 하였다. 비대면진료 제도화는 기존의 비대면진료에 대한 규제 완화와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영리 플랫폼에 대한 확실한 규제방안도 없이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면 사회구성원들의 건강을 자본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는 건강정책에 관한 비판적 연구 및 학술활동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에 기여하고자 하는 학술단체로서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정부와 국회는 비대면진료 제도화를 위한 의료법 개정 논의를 전면 중단하라. 시급히 비급여 진료 현황을 포함한 비대면진료의 전반적 규모, 관련 문제를 전면적으로 파악하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비대면진료 시범사업의 성과를 입증하라.
2. 비대면진료 제도화의 전제는 일차의료와 공공보건의료 강화이며, 이를 위해 시민사회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라. 이 과정에서 시민과 연구자의 의견을 모두 반영해 영리 플랫폼 및 비급여에 대한 규제, 안전성과 효과성 제고, 개인 의료정보 보호, 공공플랫폼 구축을 통한 일차의료 및 공중보건 강화와 관련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라.
3. 탄탄하고 촘촘한 소지역 단위의 포괄적 일차의료 및 건강관리체계, 지역 사람들의 의료이용으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지속가능하고 강력한 공공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고, 정부가 진정으로 사회구성원의 건강을 제고할 의지가 있다는 점을 증명하라.
2025년 11월 9일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