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삶의 의무를 강요할 수 있는가? 안락사 도입을 논의해야 한다
중증 요양보호 현장에 실습을 다녀온 한 예비 사회복지사가 안락사 도입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사회에도 안락사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그 주장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그 예비 사회복지사는 현장에서 마주한 노인들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살아 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고, 하루하루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너무 큰데 정작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어쩌면 하느님이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 주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고도 했다.
그 말이 단순히 감정적인 호소로만 들리지 않았던 것은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하나의 현실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며, 어떤 경우에도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생명의 존엄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을 존중한다는 말이 반드시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 있어야 한다는 의무를 의미하는 것일까?
인생을 살아가는 데 들어가는 고통과 희생은 너무나 큰데, 정작 살아가면서 얻는 행복과 만족은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기쁨은 사라지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절망만 남은 경우도 있다. 경제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필자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가는 데 드는 비용은 너무 큰데 얻는 편익은 거의 없는, 이른바 적자인생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이다.
물론 사람의 생명을 경제적 손익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적자인생이라는 표현도 사람의 가치가 적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현실도 단순히 개인의 정신력이나 의지 부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고통의 원인이 다르다.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고립, 질병, 노화, 가족관계의 단절 등 다양한 요인이 삶을 버겁게 만든다. 그렇다고 자살과 안락사를 같은 문제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극심하고 회복 불가능한 고통에 놓인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삶에 관해 선택할 수 있는 제도적 권리를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을 위한 일인가?
현대 의학은 과거라면 불가능했던 생명 연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연장이 당사자에게 바람직한 삶을 제공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의료기술로 심장박동을 유지하고 신체의 기능을 연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고통 없는 삶이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특히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말기 환자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에게 무조건적인 생명 연장만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생명 존중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고통을 줄이는 완화의료와 호스피스가 우선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적절한 치료와 돌봄을 받지 못해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경제적 형편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거나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안락사 제도 이전에 사회복지의 실패다.
그렇지만 충분한 치료와 돌봄을 받았음에도 회복할 가능성이 없고, 당사자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지속적으로 겪는 경우까지 제도적으로 외면해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안락사는 생명의 경시가 아니라 자기결정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안락사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생명은 신성하며 인간이 임의로 생명을 끝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종교적·윤리적 관점에서 충분히 존중할 만한 입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면,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일정한 자기결정권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안락사를 누구에게나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순간적인 절망이나 우울감, 경제적 어려움,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의사결정 능력이 있는 당사자의 자발적이고 반복적인 의사 확인, 독립적인 의료진의 판단, 충분한 숙려기간, 정신적·사회적 지원, 가족이나 주변인의 강요 여부 확인 등 엄격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장애나 노화, 치매 또는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안락사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요양 현장에서 만나는 노인과 중증 환자들의 삶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이유로 죽음을 권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이 충분한 돌봄을 받고도 자신의 마지막에 관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사회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살아야 한다는 주장만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중요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의료와 복지의 중요한 성과로 여겨왔다. 이제는 질문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만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은가? 그리고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을 계속 감당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안락사 도입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오남용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압박, 생명 경시로 이어질 가능성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논의 자체를 금기시해서도 안 된다.
생명을 지키는 사회라면 고통을 줄이는 데도 책임을 져야 한다.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함께, 회복 불가능한 고통 속에 놓인 사람의 마지막 자기결정권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도 논의해야 한다.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삶의 마지막을 선택할 권리에 대해서도 사회는 답해야 한다.
필자는 안락사 도입을 둘러싼 정치적·제도적 전망을 떠나, 이제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소중하다. 그러나 생명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인간이 겪는 고통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