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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과 거짓만 있는 논리의 가치?

신이 있는지 없는지, 참과 거짓으로 판별할 수 없다 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 특히 일부에선 사이비 종교활동까지 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교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심이 가기도 한다. 사실 과학에서도 참 아니면 거짓인 명제가 아닌 경우는 수두룩하다. 흔히들 지구 온난화 등을 말하며 이상기후 이상기후 하지만, 우리의 지식 및 과학이 이상한 건 지 자연이 이상한 건지 생각해보면 좀 다른 생각이 든다. 즉 과학 명제도 시대가 바뀌며, 참이 거짓이 되었다가도 또 지식이 발전하면서 거짓이 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서 설명했던 것을 다시 생각해보자. 실수 중 유리수가 아니면 무리수라고 한다면 유리수와 무리수를 사칙연산에 닫혀있는지 없는지 엄청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유리수와 유리수를 더하면, 유리수라고 하지만, 무한한 유리수의 덧셈은 무리수가 나온다는 것이다. 파이도 유리수를 무한히 더해가는 것이 아닌가. 물론 당연히 무리수와 무리수를 더하면 유리수가 나올 수 있다. 


또 순환소수와 비순환 무한소수의 구분도 어렵다. 순환소수의 순환마디길이가 무한대까지 나올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보라, 순환마디가 무한한데, 그것을 어떻게 순환소수라 단정할 수 있겠는가. 순환마디 길이는 대개 소수 자신보다 1 작은데, 소수는 무한대이므로, 순환마디길이는 무한대가 될 수 있다고 앞서 주장했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를 완전히 분리한다는 것이 헛된 이상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경제 민주화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게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심지어 법적인 판결도 정치와 완전히 분리해서 이뤄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세상에 종교 같은 비합리적 믿음이 전혀 가미가 안된 과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필자가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과학자가 불교도 아닌(불교는 나름대로 지식을 탐구하는 종교라고 보인다) 기독교를 믿는 경우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도 사람인 이상 복을 기원하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종교는 감성 및 감정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큰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깐 논외로 흔히들, 잠 특히 꿈이 우리의 욕망을 배출하는 해우소 같다고 알려져 있지만, 살아오면서 경험해보니, 부정적 감정에 허우적거릴 때는 꿈도 악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여러 글들을 보면, 치매로 가는 노인들이나, 정신 질환자의 경우는 악몽을 꾸는 것으로 전해진 듯하다. 우리는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서도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자가진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꿈과 현실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연관되어 있다.  


논리도 신이 있다, 없다, 특히 종교적 가르침을 과감히 참과 거짓으로 구분해보는 게 필요하다. 목사들이 이 말했다, 어쩔 때는 저 말했다 하는 경우는 충분히 참과 거짓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기도를 하면 낫는다 하여 기도를 하니 안 나으면, 정성이 부족했다고 오히려 나무라는 무당, 또 우연치 않게 나으면 자기 덕에 나았다고 주장하는 무속인들같이 목회자들의 설교가 이런 논리라면 믿거나 말거나 아니겠는가. 


사실 이와 같은 논리는 우리가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 일본의 식민 지배 덕이고, 만약 근대화에 실패했다면, 우리나라 민족성 탓이라 하는 식의 노리에서도 나온다. 논리적으로 일부가 말하는 신식민지 근대화론은 따라서 거짓이라고 판정하거나 적어도 가능성에 대한 명제로 참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여기서 다만 참이라 할 수 없다고 하여 100% 거짓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명제에서 A는 B이다가 거짓이 되려면 어떤 A, 설령 1개라도 B가 아닌 것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수 없는 세상에서 알아가는 것이다. 논리도 참과 거짓만 있는 게 아니라, 믿음과 이성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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