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이 내일모레인데, 사이비진보들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미칠 일이다. 사이비 진보들의 선동이 심해질수록 우리 머리는 냉철해야 한다. 오늘날 사이비 진보들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 기본소득과 소비지원금이다. 그런데 우리 생각해보자.
복지는 돈을 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 완전고용을 복지의 최우선 목표로
“대가리를 깨버린다, 이 새끼야.”
현직 요양보호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방문요양을 받는 어르신에게 욕을 듣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혼자 생활하는 시간이 길고, 여러 가지 이유로 감정 조절이 어려운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욕설에는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말끝마다 욕설이 붙더니 급기야 요양보호사를 향해 협박성 발언까지 쏟아냈다. 요양보호사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지?’
결국 요양보호사를 관리하는 사회복지사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저도 그분이 어려운 처지라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계속 욕을 하고, 오늘은 대가리를 깨버린다는 말까지 하더군요. 제가 왜 이런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더했다.
“아니, 저런 분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어 국가에서 꼬박꼬박 지원을 받는데…… 정말 이런 식으로 복지가 운영되는 것이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회복지사는 요양보호사의 등을 토닥였다.
“그분은 환자잖아요. 이해하세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기분 푸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혼자 사는 데서 오는 외로움이 있을 수도 있고,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국가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것 역시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긴다.
복지는 정말 돈을 주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복지가 발전할수록 우리는 ‘돈을 얼마나 줄 것인가’보다 ‘어떻게 다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할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증 장애인이나 고령자, 심각한 질병을 가진 사람처럼 노동시장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무조건 일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복지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 역시 복지다.
어쩌면 돈을 주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인 복지일 수도 있다.
가령 어떤 장애인이 매달 장애인연금을 받으면서 집에만 있는 것과,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 중 어느 쪽을 더 원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상당수는 후자를 원할 것이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니까 돈을 주세요.”
이것보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일하게 해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훨씬 건강한 사회 아닐까.
복지의 목표는 사람을 복지제도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복지제도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돈을 주는 복지와 일할 기회를 주는 복지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복지가 ‘현금 지원’과 너무 강하게 연결됐다.
기초생활보장, 각종 수당, 연금, 지원금 등이 확대되면서 국가가 국민에게 돈을 지급하는 일은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물론 이것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돈을 받는 사람에게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함께 따라가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돈을 지급하는 것 자체가 정책의 종착점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상한 현상이 생길 수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매일 아침 출근해서 세금을 내고, 월급에서 보험료와 세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살아간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아도 각종 지원을 받는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근로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다.
“나는 죽어라 일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고, 저 사람은 일하지 않아도 국가가 도와주는 거야?”
이런 불만이 커지면 복지제도 자체에 대한 공동체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더구나 복지의 대상자가 사회적으로 배려받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까지 용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타인을 함부로 대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복지 대상자라고 해서 사회적 의무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복지는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제도이지, 인간의 모든 행동을 면죄해주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
나는 오히려 진보가 과거의 진보적 이상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의 핵심은 단순히 국가가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난과 불평등에서 벗어나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진보의 중요한 목표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복지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단연 완전고용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돈을 나눠주는 사회보다,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도록 하는 사회가 훨씬 건강하다.
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장애인이니까 매달 돈을 드리겠습니다.”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
하루에 몇 시간밖에 일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면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
몸을 많이 움직일 수 없다면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
사람을 상대하기 어렵다면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그 사람에게 ‘당신도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돈은 소비할 수 있지만, 일은 사람에게 소속감을 준다.
돈은 통장에 들어오지만, 일은 “내가 오늘 무엇인가를 했다”는 자존감을 준다.
돈은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일은 사람을 사회와 연결한다.
그래서 나는 일자리 정책을 복지정책의 가장 앞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급자에게 일을 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완전고용을 주장한다고 해서 모든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당장 일을 시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증 장애인에게 억지로 일을 강요하자는 것도 아니다.
노인에게 힘든 노동을 시키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일할 기회를 보장하고, 일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소득보장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현재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건강 때문이라면 치료와 재활이 먼저일 것이다.
기술이 없어서 취업하지 못한다면 직업훈련이 먼저일 것이다.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못 한다면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를 돌보느라 일을 못 한다면 돌봄서비스가 필요하다.
장애 때문에 일반적인 직장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장애인 맞춤형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건너뛰고 “여기 돈 줄 테니 살아가세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쉬운 방법일지는 몰라도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 수 있다.
복지는 사람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
복지의 가장 무서운 함정은 사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에서 분리해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가난하니까.”
“당신은 장애인이니까.”
“당신은 노인이니까.”
“당신은 어려운 사람이니까.”
이렇게 분류한 뒤 돈을 지급하고 끝내버리면 그 사람은 어느 순간 스스로를 사회의 주체가 아니라 ‘복지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돈만이 아니다.
역할이다.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있고,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내가 한 일에 대해 누군가 “잘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다.
그래서 나는 복지정책의 순서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일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일할 수 있다면 일자리를 제공하고,
일하기 어렵다면 훈련과 재활을 제공하고,
그래도 어렵다면 소득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노동능력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사회가 책임지고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오히려 더 따뜻한 복지가 아닐까.
다시 그 요양보호사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가리를 깨버린다”는 말을 들었던 요양보호사에게 사회복지사가 했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분은 혼자잖아요. 이해하세요.”
하지만 나는 거기에 한마디를 더 붙이고 싶다.
“그분이 환자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그분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어렵다는 이유로 지원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원과 함께 다시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일자리를 주고, 사람을 만나게 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복지가 단순한 현금 지급을 넘어선다.
국가가 국민에게 돈을 주는 것은 쉬울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훨씬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한 정책이다.
나는 진짜 진보적인 국가는 복지수당을 자랑하는 국가가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일한 사람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국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복지정책의 가장 높은 곳에 완전고용이라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돈을 주는 복지에서 끝나지 말자.
일할 기회를 주는 복지로 나아가자.
누군가에게 매달 수당을 지급하는 것보다 더 좋은 복지는 어쩌면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도 우리 사회의 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당신의 노동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돕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불쌍한 대상으로 만드는 복지가 아니라, 사람을 다시 사회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복지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출발점이 완전고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