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지만 실질적 변화를 낳기엔 미흡한 법 개정
- 충분한 전문의 고용을 의무화해 전공의 착취에 의존하는 병원 구조를 변화시켜야.
- 병원 내 성차별을 없앨 실질적 변화가 이뤄져야.
지난 24일,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전공의법) 개정안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
지난 '의료대란' 과정에서 한국의 병원들이 피교육자인 전공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의사 중 전공의 비율이 OECD 주요국의 경우 10% 안팎인데 반해, 한국의 대형병원은 30%에서 50%에 육박한다. 피교육자들의 파업으로 한국 의료체계가 마비된 것은, 병원들이 값싼 전공의를 대상으로 엄청난 노동착취를 해온 결과다.
우리는 이런 살인적 노동환경이 전공의와 환자 모두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이 변화하길 바라며 아래와 같이 입장을 밝힌다.
첫째, 전공의 총 노동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연속 노동시간이 최장 36(+4)시간에서, 24(+4)시간으로 축소된 것이 이번에 가장 큰 개정 사항이다. 매우 의미 있는 변화이다.
그러나 주당 80(+8)시간 노동시간 상한은 현행유지되어 정작 총 노동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법정 근로시간의 무려 2배에 달하는 80시간 노동제는 이번에도 존치되었다.
게다가 연속 근무시간과 총 노동시간 상한을 어겨도 병원에 500만원 과태료만 부과하는 솜방망이 처벌규정이 변화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 상 관련조항 처벌 규정이 '2년 이하의 징역'인 것과 대비된다.
현장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지나치게 미흡한 개정안이다.
둘째, 정부가 병원에 충분한 전문의 고용을 강제해야 한다.
현실에선 80시간 상한조차 지켜지지 않아 실제로는 100시간 넘게 일하는 전공의가 많다. 서류상 '수련시간'과 실제 노동시간이 불일치하는, 기록되지 않은 노동착취가 부지기수다. 이는 피교육자에 대한 압묵적 압박 뿐 아니라, 인력의 절대 부족으로 정해진 시간 내 마칠 수 없는 노동량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원에 전문의 인력을 늘리는 것이다. 인력 부족은 민간 중심 공급체계에서 병원들이 값싼 전공의 착취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데서 비롯한다. 병원들은 돈이 없다고 하지만 엄청난 초과착취로 남긴 돈으로 수도권에 분원을 설립하는 등 몸집만 불리고 있다. 그럴 돈이 있다면 전문의 고용부터 제대로 해야 하고 정부는 그것을 의무화해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이 의료대란 사태로 조금이라도 배운 게 있다면 '전공의 중심 병원'부터 당장 바꿔야 한다. 그런데 인력충원은커녕, 명목상 총 노동시간 감축도 강제하지 못했으니 병원 경영자들 눈치만 보는 것이 아닌지 의심케 된다.
셋째, 병원 내 성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환영한다.
이번 개정 조항 중에는 전공의 모집 및 선발 과정에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이 있다. 성차별에 대한 신고, 조사, 시정명령 등이 명시되었다. 이는 매우 의미 있다. 여전히 노골적으로 특정 성별 위주로 선발하는 과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정형외과, 비뇨의학과, 신경외과 등에서 여성 전공의 비율은 극단적으로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신‧출산한 전공의에 대한 야간 및 휴일근무 제한조치, 육아와 질병 등으로 인한 휴직을 보장한다는 내용 등 당연한 내용들을 이제라도 법으로 명시한 것을 환영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내용이 실질적으로 담보되려면 임신‧육아 등으로 인한 휴직 중에도 이를 대체할 전문의 인력이 필요하다. 전공의들이 짊어져야 할 총 노동량이 줄지 않으면 다른 전공의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다.
실질적 전공의 노동시간 감소, 실질적 모성 보호와 질병 휴직 등이 가능하려면 병원에 전문의 인력을 늘리려는 노력을 정부가 지금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정부는 상급종합병원 구조개혁, '필수의료' 수가 인상 등 명목으로 병원에 천문학적 건강보험 재정을 투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온갖 특혜를 주면서 정작 사용자들에게는 별다른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충분한 인력고용을 의무화하지도, 살인적 노동시간을 축소하도록 강제하지도 않고 있다. ‘전문의 중심 병원’을 만들겠다 했지만 실제로는 ‘PA 중심 병원’이 돼 가고 있다.
우리는 최근 전공의들이 최근 이 문제에 더 적극 목소리 내려는 것을 환영한다. 제대로 된 변화는 병원 사용자들에 맞서 투쟁할 때 가능하다. 우리는 그 길에 함께할 것이다.
2025. 9. 30.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