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들과 달리 둘째인 딸은 맨날 놀기 바쁘느라고 공부를 못했다. 대학은 고사하고 고등학교도 평준화된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했을 정도다. 첫ㅉ 아들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근사한 대기업을 다닌다. 명절이면, 아들이 준 용돈으로 풍요롭게 지냈다. 그러니 노는 물도 달랐다. 딸은 결혼생활도 실패했고, 친구들도, 모두가 밑바닥 생활을 하는 터였다.
아들은 그런 여동생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동생하고 엮이는 것 자체를 싫어한 듯하다. 그래도 동생인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매사가 FM인 아들에게 딸의 편에 서서 나무라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의 장모가 뇌졸중이 와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간병보험까지 들어놔서 병원비와 간병비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보험사에 붙여준 간병인이 문제였다. 친절하지도 않고, 장모를 기계적으로만 간병을 하는 것이었다. 장모는 불편 불만이 작지 않았다.
간병을 바꿔달라고 떼를 부려 다른 간병인 왔지만, 그들도 마찬가지다. 인간미가 없는 돈을 버는 기계와 같았다. 그렇게 고민 하던차 아들은 여동생의 친구가 요양보호를 하고 있다고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급하니까 아들은 여동생에게 친구중에 간병해줄 사람이 있는지 소개시켜달라고 했다.
정이 많은 여동생은 당장 친한 친구에게 간병을 부탁했다. 보험사에서는 간병비를 돈으로 줄테니 가족 간병을 하라고 했던 차, 바로 여동생의 친구가 장모의 간병을 맡게 되었다.
친구는 친구 오빠의 장모이자, 거의 가족이라 생각하고 간병을 맡았다. 장모는 매우 만족하고 흡족했다. 사위에 대해 고맙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아들은 처음으로 여동생에게 진짜 고맙다고 인사했다.
우리는 명문대를 간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만, 존경까지는 하지 않는다. 아무리 의사 검판사가 되었다한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우러러봐야 할것도 아니다. 학교교육은 지능수준만을 측정한다. 그러니 학교교육을 통한 서열화는 이미 잘못된 것이다.
지능이 높으면, 사회적 가치를 증식시킬 기회나 능력이 높긴 하다. 그런다고 지능만으로 남을 위해, 사회적 가치를 증식시키지는 않기에, 의사 검판사들은 지능수준보다 공감능력을 측정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