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따라선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이 더 고통스러운게 사실이다. 우리가 속도는 느낄 수 없지만, 가속도는 느낀다고 학교에서 배웠지만, 사실은 상대적인 속도는 모두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차가 동일한 속도로 달리면, 속도감이 없다고 하지만, 차창밖과 비교하면 속도감은 금방 느껴진다. 가속도란 것도 이전 시기의 감과 현재시기의 감의 차이를 느끼는 것이다. 마치 실질(절대)성장율은 과거 시기와 현재시기의 물가비로 현재시기의 총소득을 나누어 주어, 사실상 과거의 소득과 현재의 소득을 비교하는 것인데 이것은 가속도같은 느낌이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일정속도는 상대소득과 같은 것이다. 차안과 차밖의 비교로 속도감을 갖게 되듯이 상대소득은 나와 타인, 우리 국가와 외국을 비교하며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국어(영어)에서 우열의 표현은 반드시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교대상이 없으면, 우열의 표현 자체가 옳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홍보광고에서서도 우열의 표현은 반드시 비교대상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장광고 아니면 현혹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린 과거의 저명한 이론은 대개가 많은 변수를 성장율에 비교해왔다. 우리나라만이 성장지상주의자가 된것이 아니라, 경제이론에서도 성장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고 가르치고 배웠다. 그러나 오늘날 출산율이며, 실업률이며 성장해서 이루려하는 중요한 가치는 더 형편없이 몰락하는 느낌이다. 지금이라도 상대적 빈곤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보의 상대적 격차는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는 악순환의 과정을 밟게 된다. 특히 공유화와 민영화의 대립구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공사립을 떠나 돈때문에 공부하기를 포기하는 학생이 없는 것이 진정한 평등 교육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공교육 강화는 국립이냐 사림이냐 대립구도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누구나 소득에 의해 교육 소비에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간혹 누군가는 돈을 잘버는 데도 애를 낳지 않은 것은 가난때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상대적으로 보아야 한다. 성과를 독점하는 사회에서는 그 독점자가 되지 못한 이도 불행하지만, 그 독점자가 되기 위한 고통도 불행이다.
우린 낙오하지 않기 위해 살고 있다. 낙오자는 그 자체로 악몽같은 세월을 보내지만, 낙오를 하지 않는 사람도 낙오하지 않기 위해 악몽같은 세월을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싸움은 자녀 세대로 상속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느낄 수 있는건 상대적이다고 할 수 있다. 속도도 가속도만이 아니라 상대적이면 느낄 수 있고, 빈부차도 상대적일때 말을 안해도 느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