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우울, 분노가 이끌어가선 안된다. 불안이 미래에 삶의 효용(행복)보다 삶의 비용(어려움)이 커질 것같은 생각에서 비롯된다면, 우울은 현재의 삶의 비용이 효용보다 큰 상태에서 발생하고, 분노는 과거의 삶의 비용이 효용보다 컸던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가 너무 슬퍼 과거로의 회귀를 부르짖는 이들이 미래를 강조하고, 현재의 슬픔을 과거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또한, 그 어느 시점을 강조해도 지금 우리의 불안 슬픔 분노의 감정을 누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역사는 바꿀 수 없어도, 역사에 대한 기억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우린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한 드라마에서 나온 말처럼 해피엔딩은 모든 것이 행복한 것으로 되는 것처럼, 현재와 미래를 바꾸면 역사의 기억은 바뀔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전문가는 아니지만, 극단적 선택은 우울에서만 오는게 아니다. 불안은 극단적 선택 뿐 아니라, 폭력성을 부르는 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특히 불안과 우울 분노라는 붕정적 감정은 서로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감정은 자기를 파괴하고 타인을 파괴하는 폭력을 수반할 수도 있다.
삶의 적자는 욕망이라는 수요와 충족이라는 공급에 의해 균형을 이루게 되어있는데, 대개의 종교는 공급보다는 수요조절을 중점에 두고 있다. 마음을 비우면 수요는 줄고 낮은 가격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양극화는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듯이 욕망을 줄이기가 어렵다. 욕망은 커져있고, 충족은 어려운 이들이 너무나 많이 양상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제 삶의 적자를 개선하는제,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비는 오고 울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