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은 삶속에서 얻는 행복감을 초과한지 오래다. 불안은 성미가 급하고 욱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인생이 도대체 왜그러냐는 슬픈 물음만 되내이게 한다. 어려서는 정신질환자라면 비만 오면 중얼거리고, 엉뚱한 소리만 하는 사람으로 여겼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네가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부정적 감정이 내가 너래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로 친밀감이 들어서는 건 왜 일까? 만약 입장을 바꿔서도 이해못 할 만행을 저지른 사람은 단순한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사이코패스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만큼 정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단지 정신질환자, 정신 이상자라면, 이 뭣 같은 세상에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나와는 다른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인생을 살다보니,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라고 하면 분명 다르게 여겨진다.
많은 정신질환자는 그 병명으로는 접근하기 싫은 게 사실이다. 아니면 무섭고 그렇다. 그러니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 이상한 말로 이어가니 자르고 말한다.
불륜과 로맨스는 동일한 사건임에도 정의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불륜이라고 하면, 천하에 못될 놈같이 여겨질 수 있지만, 로맨스라고 하면, 애뜻하고 안타깝게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그와같이 경제교과서에선, 절약의 역설이란 단어로 저축을 하는데, 우리 모두는 더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똑같은 사건에도 긴축 정책은 역설로 여기지를 않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지출을 줄여서 이익을 내려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적자 상황에서의 긴축은 지출을 줄여 수지를 개선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여진다. 과잉투자시에 그렇다.
그러나 과잉투자가 아닌데, 지출을 줄여 수지를 좋게 하려는 것은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수 있다. 돈은 순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긴축 예산 편성은 지양되어야 한다. 서로가 돈을 아끼려 한다면, 우리 모두의 소득은 줄어들게 뻔하기 때문이다.